흥천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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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문화재

  • 흥천사 동종(興天寺 銅鍾)
    보물 제1460호 | 1462년(세조8)
  • 흥천사 동종은 1462년(세조 8) 주조되었으나 중종 5년에 흥천사가 불에 타자 이후 경복궁의 광화문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창경궁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현재는 덕수궁 광명전에 모셔져 있다. 음통(音筒) 없이 두 마리의 용으로 구성된 용뉴(龍鈕)와, 종신 중단에 2줄의 융기선 횡대(橫帶)를 두른 양식을 갖추고 있다. 불룩히 솟은 천판(天板) 외연에는 상대(上帶)처럼 꾸며진 연판문대(蓮瓣文帶)를 두르고 있다. 종신 상부의 횡대 조금 아래로 방형의 유곽대(乳廓帶)를 네 곳에 배치하였는데, 내부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돌기된 종유(鐘乳)를 9개씩 장식하였다. 유곽 사이마다 원형 두광(頭光)을갖추고 합장한 모습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이 부조되었다. 종구(鐘口)에서 위로 올라온 부분에는 하대(下帶)처럼 묘사된 파도문대가 장식되어 있으며, 횡대와 이 문양대 사이에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이 종이 왕실의 발원에 의해 세조 8년에 흥천사용으로 제작된 사실과 종을 제작할 당시의 수공업(手工業) 분업 상황 및 직제(職制)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사회 제반 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_ 높이 282cm, 지름 170cm, 두께 30cm

  • 흥천사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891호 | 2016년 2월 22일 지정
  •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1894년 작성된 ‘흥천사사십이수관세음보살불량시주’ 현판 기록에 따르면 19세기경 부터 흥천사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1450년 전후 티베트계 관음보살상과 가장 흡사하고 당시 조성된 장신 계통의 보살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길고 세장한 관과 얼굴, 신체, 손과 손가락 등 장신의 늘씬한 양식을 대표하는 보살상이라고 한다. 특히 뛰어난 작품성을 감안했을 때 국가장인이 조성한 뒤 왕실사원인 흥천사에 봉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세상에 현존하는 4점의 42수 천수천안관음보살상 중 하나이므로 그 희귀성은 물론 조선 초기 신앙 경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42수 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신앙이 많이 됐지만 상으로 남아있는 예는 굉장히 드물고 또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서는 흥천사 42수 관음상이 유일하다.

  • 흥천사 대방(興天寺 大房)
    국가등록문화재 제583호 | 1865년(고종2)
  • 1865년 흥선대원군이 직접 시주하고 모연하여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직접 현판까지 적었던 전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도에는 본전인 법당 정면에 누각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흥천사에는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누각 대신 대방(큰방)이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인 능찰(陵刹)에서 보이는 가람배치이다. 대방은 H자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였으며, 전면은 겹처마의 2익공(翼工)집이고, 측면과 후면은 민도리집으로 구성하였으며, 전면양끝에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평면 구성을 보면, 몸체에 해당하는 중앙부 가운데는 대방 8칸이 있고, 그 앞뒤에 퇴칸이 놓여 마루를 구성하며, 대방의 좌측에4칸 크기의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작은 방과 헛간이 달려 있다. 따라서 누각과 방사와 법당과 숙소 및 부엌의 기능까지 합친 종합적인 다용도의 공간으로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의 건립 시기는 사중에 보관 중인 현판 기문(京畿右道楊州牧地三角山興天寺寮舍重創記文)을 근거로 고종 2년(1865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