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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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흥천사는 조선 태조임금이 신덕왕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6년에 착공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된 절이다.
일년뒤 1398년에는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대규모의 사리전을 세웠다. 조선초기의 고승이신 신미대사(1403-1480)가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한글창제를 도왔던 도량도 흥천사였다 흥천사는 도성안에 있었던 대찰로서 1424년(세종 6년)에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가 되었는데 현재 조계종 최초의 총본산이었다. 1429년(세종 11년)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청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 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고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1510년(중종 5년)에는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뒤 1569년(선조 2년)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라고 써준 사액현판이 흥천사에 전해지고 있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手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흥천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때 쓴 글씨가 남아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2013년 지치고 힘든 이들의 휴식처이자 치유처인 삼각선원을 지었다. 2015년 저소득 맞벌이가정 아이들의 보육을 위한 아동복지시설인 흥천어린이집을 건립, 개원하였다.